서론: ‘각자도생’은 끝났다, 생존을 위한 ‘적과의 동침’
2025년 11월, 한국 석유화학 업계에 거대한 지각변동이 시작되었습니다. 오랜 불황과 중국발 공급 과잉, 그리고 원가 경쟁력 상실이라는 ‘3중고’에 시달리던 국내 석유화학 기업들이 드디어 칼을 빼 들었습니다. 그 시작은 충남 대산 석유화학단지에서 터져 나왔습니다.
언론 보도에 따르면, 롯데케미칼의 대산 공장(NCC)과 현대케미칼(HPC)이 합병하여 새로운 합작법인(JV)을 출범시킨다는 소식입니다. 이는 기존에 롯데케미칼이 현대케미칼의 지분 40%를 보유하고 있던 협력 관계를 넘어, 아예 생산 설비와 운영 주체를 하나로 묶는 ‘완전한 물리적 결합’을 의미합니다.
이번 빅딜은 단순히 두 회사가 합쳐진다는 뉴스가 아닙니다. 이는 ‘나프타’ 하나에만 의존하던 ‘구(舊) 방식(NCC)’이 더 이상 독자 생존할 수 없음을 인정하고, 정유사 기반의 ‘신(新) 방식(HPC/Integration)’에 흡수 통합되는 ‘산업 재편의 서막’입니다.
이 글에서는 이번 롯데-현대 빅딜의 핵심 내용을 요약하고, 당사자인 두 기업의 재무/운영적 영향, 그리고 발등에 불이 떨어진 경쟁사(LG, YNCC)와 여유로운 경쟁사(GS, S-Oil)의 엇갈린 운명을 심층 분석합니다.

1. 뉴스 심층 요약: ‘NCC’와 ‘HPC’의 결합, 무엇을 의미하는가?
이번 딜의 핵심은 롯데케미칼이 보유한 ‘대산 NCC(나프타 분해 설비, 연산 110만 톤)’ 부문을 분할하여, 현대오일뱅크와 롯데케미칼의 합작사인 ‘현대케미칼’과 통합하는 것입니다.
- 구조: 현대케미칼은 이미 현대오일뱅크의 정유 공장과 연계된 HPC(Heavy-feed Petrochemical Complex) 설비를 보유하고 있습니다. 여기에 롯데의 NCC가 더해지면, ‘정유-HPC-NCC’로 이어지는 거대한 통합 생산 기지가 탄생합니다.
- 목적: 명확합니다. ‘원가 절감’입니다. 롯데의 낡은 NCC는 비싼 나프타를 써야 해서 적자를 면치 못했습니다. 하지만 현대케미칼과 합치면, 현대오일뱅크에서 나오는 값싼 ‘부생가스’나 ‘LPG’, ‘탈황 중질유’ 등을 롯데 NCC에도 투입하거나 원료를 교환(Swap)하여 전체적인 제조 원가를 획기적으로 낮출 수 있습니다.
- 의미: 이는 한국 석유화학 역사상 최초로 ‘기존 NCC 업체(롯데)’가 ‘정유사 기반 화학사(현대)’ 주도로 재편되는 사례입니다. 즉, 석유화학의 주도권이 ‘순수 화학사’에서 ‘정유사’로 넘어가고 있음을 상징합니다.
2. 당사자 분석: 롯데와 현대, ‘윈-윈’ 게임의 셈법
이번 합병은 양사 모두에게 절실한 생존 전략이자, 재무/운영 측면에서 명확한 로드맵을 제시합니다.
① 롯데케미칼: ‘적자 탈출’과 ‘리스크 헤징’
- [재무 측면]
- 단기: 대산 NCC 부문을 떼어내 현대케미칼과 합치면서, 연결 재무제표상 ‘적자 사업부’의 리스크를 분산시킬 수 있습니다. (지분법 이익/손실로 반영) 또한, 자산 재평가를 통해 부채 비율을 낮추는 효과도 기대됩니다.
- 중장기: 고질적인 NCC 원가 열위를 극복하여 수익성을 회복합니다. 적자 폭이 줄어들면, 그동안 중단 위기에 놓였던 ‘수소’, ‘배터리 소재’ 등 신사업 투자를 재개할 현금 흐름(Cash Flow)을 확보할 수 있습니다.
- [운영 측면]
- 원료 다변화: 가장 큰 수혜입니다. 더 이상 비싼 나프타 가격에 휘둘리지 않고, 현대오일뱅크로부터 저가 원료를 안정적으로 공급받게 됩니다. 이는 가동률을 획기적으로 높이는 기반이 됩니다.
② 현대케미칼 (HD현대오일뱅크): ‘규모의 경제’와 ‘다운스트림 확장’
- [재무 측면]
- 단기: 롯데의 대산 NCC 자산을 흡수하면서 자산 규모가 급증합니다. 초기에는 노후 설비 통합 비용이 들겠지만, 통합 구매 및 운영 효율화를 통해 ‘고정비 절감’ 효과를 즉각적으로 누릴 수 있습니다.
- 중장기: 연산 200만 톤급 이상의 에틸렌 생산 능력을 확보, 규모의 경제를 통해 단위당 생산 원가를 낮추고 아시아 시장에서의 가격 협상력(Bargaining Power)을 강화합니다.
- [운영 측면]
- 밸류체인 완성: 현대케미칼은 기초 유분(에틸렌) 생산 능력은 좋았지만, 이를 제품화할 ‘다운스트림(PE, PP 등)’ 라인업은 상대적으로 부족했습니다. 롯데케미칼 대산 공장의 풍부한 다운스트림 설비를 확보함으로써 **’원유(현대) → 기초유분(통합법인) → 제품(롯데 라인)’**으로 이어지는 완벽한 수직 계열화를 완성하게 됩니다.
3. 위기의 그룹: ‘낙동강 오리알’이 된 NCC 경쟁사들 (LG, YNCC, SK, 대한유화)
이번 빅딜은 경쟁사들에게 ‘공포’ 그 자체입니다. 대산 단지 내에서 원가 경쟁력을 갖춘 거대 공룡이 탄생했기 때문입니다. 상대적으로 경쟁력이 떨어지는 기업들은 이제 ‘선택’을 강요받게 되었습니다.
① LG화학 (대산/여수): “고립을 피하라”
- 영향: 대산 단지에서 바로 옆집인 롯데가 현대와 손잡고 원가를 낮추는 동안, LG화학 대산 공장은 여전히 비싼 나프타를 써야 하는 ‘고립된 섬’이 되었습니다. 원가 경쟁에서 밀려 가동률을 더 낮춰야 할 위기입니다.
- 대응 방향:
- 매각 또는 제3의 빅딜: LG화학 역시 대산 NCC를 독자 운영하기 어렵습니다. 한화토탈에너지스와의 협력을 모색하거나, 아예 대산 NCC를 매각하고 여수 단지와 첨단 소재(양극재)에 집중하는 ‘사업 철수’ 시나리오가 가속화될 것입니다.
- 여수 집중: 상대적으로 효율이 좋은 여수 단지에 집중하되, 이곳에서도 GS칼텍스와의 원료 통합을 서두를 수밖에 없습니다.
② 여천NCC (YNCC): “생존 시계가 빨라졌다”
- 영향: 국내 최대의 ‘순수 NCC’ 기업인 YNCC는 이번 딜의 최대 피해자가 될 수 있습니다. 경쟁사들이 정유사와 결합해(현대-롯데, GS-LG 등) 원가를 낮추는 동안, 정유사 파트너가 없는 YNCC의 원가 경쟁력은 상대적으로 더 악화됩니다.
- 대응 방향:
- 구조조정 가속화: 1, 2, 3공장 중 노후화된 1공장의 ‘영구 셧다운(폐쇄)’ 압박이 더욱 거세질 것입니다.
- 주주사 결단: 주주인 한화와 DL케미칼이 YNCC를 살리기 위해 추가 자금을 투입할지, 아니면 ‘청산’에 가까운 고강도 구조조정을 단행할지 결단해야 할 시점입니다.
③ SK지오센트릭 & 대한유화 (울산): “친환경만이 살길”
- 영향: 울산 단지의 노후 NCC들은 현대-롯데 연합군의 저가 물량 공세에 직면하게 됩니다. 범용 제품 시장에서의 설 자리는 완전히 사라졌습니다.
- 대응 방향:
- SK지오센트릭: 기존 NCC의 폐쇄 속도를 높이고, 폐플라스틱 재활용 단지인 **’ARC(Advanced Recycling Cluster)’**로의 전환을 더욱 서두를 것입니다. “우리는 더 이상 석유화학 회사가 아니다”라는 선언을 증명해야 합니다.
- 대한유화: 독자 생존이 불가능해졌습니다. 이번 롯데-현대 딜을 모델 삼아, S-Oil(샤힌 프로젝트)이나 다른 정유사와의 M&A를 필사적으로 타진해야 합니다.
4. 여유로운 그룹: ‘꽃놀이패’를 쥔 정유사들 (GS, S-Oil)
이번 딜은 “결국 정유사가 이긴다”는 명제를 증명했습니다. 원유와 원료를 쥔 정유사들은 느긋하게 시장 재편을 관망하며 이익을 극대화할 것입니다.
① GS칼텍스: “여수의 지배자”
- 영향: 롯데가 대산에서 현대와 손잡았듯, 여수의 석유화학 기업들(LG, 롯데 여수공장)은 이제 살기 위해 GS칼텍스의 문을 두드릴 것입니다. GS칼텍스의 MFC(혼합분해설비) 가치는 더욱 올라갑니다.
- 예상 전략: 급하게 움직일 필요가 없습니다. 원가 경쟁력을 잃은 인근 NCC 업체들에게 저가 원료(LPG 등)를 공급하는 계약을 맺거나, 헐값에 나온 알짜 다운스트림 설비를 인수하며 여수 단지 내 영향력을 확대할 것입니다.
② S-Oil (에쓰오일): “초격차의 완성”
- 영향: 현대-롯데의 합병 법인이 탄생해도, 2026년 가동될 S-Oil의 ‘샤힌 프로젝트(TC2C)’의 원가 경쟁력에는 미치지 못할 가능성이 높습니다. (원유 직접 투입 vs Residue 투입)
- 예상 전략: 경쟁사들의 구조조정으로 시장 공급이 줄어드는 것은 S-Oil에게 호재입니다. 샤힌 프로젝트 완공에 집중하며, 기존 NCC들이 도태된 빈자리를 ‘샤힌’의 물량으로 채우며 ‘울산의 패권’을 쥘 준비를 할 것입니다.
결론: ‘통합’은 선택이 아닌 필수, 한국 석유화학의 ‘새 판’이 짜졌다
현대케미칼과 롯데케미칼 대산의 빅딜은 한국 석유화학 산업이 ‘다수(多數)의 NCC 난립’ 시대에서 ‘소수(少數)의 통합 정유-석화 기업’ 시대로 전환됨을 알리는 역사적 사건입니다.
이제 시장의 규칙은 단순해졌습니다. “정유사와 한 몸이 되거나(Integration), 독보적인 기술(친환경/스페셜티)을 가지거나.”
이 두 가지 조건 중 하나라도 충족하지 못하는 ‘애매한 NCC’ 기업들은, 이번 빅딜을 기점으로 가속화될 구조조정의 파도 속에서 역사 속으로 사라지게 될 것입니다. 투자자들은 이제 기업의 간판이 아니라, 그 기업이 ‘누구와 손을 잡고 원가 방어막을 구축했는지’를 철저히 검증해야 할 때입니다.
